여름 외투
2024. 8. 13.

문학동네시인선 193 김은지 시집 여름 외투 중에서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많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준 사람들에 대해 쓸까

크리스마스카드에 절교하고 싶었다고 쓴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나중에 같은 방식으로 상처 준 것에 대해

코감기 약을 먹고 꾼

잠수함 꿈에 대해

 

너무 늦게 걷는 것도 몸에 안 좋다던데

혼자서는 더 늦게 걷는다

 

관객석으로 만들어진 데크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을 때

바람에 꿀이 든 것처럼 쾌적한 날씨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계단에 등을 기댔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갑자기 퇴직하고

갑자기 휴일을 보내면서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인선 뉴스레터 <우리는 시를 사랑해>를 읽으면서 올해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김소연 시인의 글과 추천시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래서 김소연 시인이 소개한 시집은 대부분 사서 읽었다. 이 시는 6월 19일, 김소연 시인의 <우시사>가 마무리되는 편지, <이번엔 답장을 쓸 수 있어 행복합니다>에 소개되었다. 거기엔 독자 이성미 님의 편지와 김소연 시인의 답장이 담겨 있다. "아마 제가 여름에 가지고 싶은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해요. 그 '한없음'이 바로 여름의 마음 같아요." 이성미 님의 편지에 있는 이 구절이 참 좋다. 한없음에 대해 골몰하게 되는 한여름이 한창이다.

 

 김소연 시인의 <우시사>가 마무리 될 무렵, 나는 시를 덧붙인 편지를 종종 썼다. 그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내 삶에서 큰 의미가 되었다. 여름 외투처럼 어깨를 감싸주는.

 편지는 여름이 짙어지면서 마무리되었다. 나의 이번 여름은 시와 편지 덕에 한없이 찬란했다. 그렇기에 계절과의 갑작스러운 작별이 오기 전에 작별인사를 미리 적어 두고 싶다. 김소연 시인의 인사말을 빌려.

 여름을 여름답게 지내시다가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 또 반갑게 되어요.

 

 

 

 

김소연 X 우리는 시를 사랑해 | Notion

<우시사> 참여 기간 동안 김소연 시인이 소개한 시집의 목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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