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
2024. 9. 20.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57

이혜미 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

 

빛의 자격을 얻어

 

 

원경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 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잠시의 영원이라 믿으며. 섬 저편에 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에도 소라의 품속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는 아니야. 아침의 눈꺼풀 속으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밤의 마중, 꿈의 배웅.

 

 바래다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의 경계선이 손을 내밀듯. 꿈을 밤 가까이 데려오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것들 중 가장 멋진 게 바로 시간이니까.

 

 최대한 위태롭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바다에 가자. 무게를 잊고 팽팽한 수평선 위를 걸어봐.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이 쏟아지도록.

 

 

 

 


 여행을 통해 우리는 “깨져버린 것들이 더 영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꺠진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빛과 조우할 때, 찰나의 마주침으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안다. 다시 눈을 떠 아침을 맞이할 이 역시 그럴 것이다.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원경)이 쏟아질 때, 그 빛은 그의 아주 깊은 곳, “물방울”들이 맺혀 있는 자리에 닿아 아직 흘러나오지 못한 말들을 비출 것이다. 눈이 부실 만큼 반짝이는 말들을 시인은 더 이상 삼키지 않고, 감추지 않고 내보일 것이다.

(해설: <생장기>, 소유정 문학평론가 중에서)

 

 

 이혜미의 시는 아름답다. 단어와 단어가 모여 영롱하고 황홀한 빛을 낸다. 그 단어들은 모이기 이전에 "깨져버린 것들"(홀로그래피)이어서 도처에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가 품고 있는 빛은 어딘가 애처롭다. 결코 저버리지 못할 약속처럼 희망적이다.

 

 <원경>은 <빛의 자격을 얻어>의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 같은 시라고 생각한다. 시집의 맨 처음에서 나를 맞이해준 이 시를 시집을 덮고 나서 다시 펼쳐 읽었다.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이 쏟아지는 듯하다. 나는 이토록 영롱하게 깨져버린 글자들을 마음에 주워 담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빛의 자격으론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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